1. 소개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을 억눌러왔다. 고통은 부끄러운 것이고 고통을 말하는 것은 나약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은 그것을 감추려고 했지 고통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언어 없음’의 상황에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제 고통을 겪는 이들이 고통이 없는 것은 ‘정상 상태’가 아니라고, 고통은 늘 상존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
몸이 아픈, 마음이 힘든, 헤어짐이 슬픈,
이 따위 세상에서 도무지 못 살겠는 사람들..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이들과 그 곁을 들여다보는
신중하면서도 사려 깊은 이야기의 세계
2. 메모
✍🏻 고통과 절망
📎 어떻게 하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전시하여 소비하지 않되 고통의 절대성에 사람들이 충분히 공명하게 할 수 있을까?
📎 끝이 없다는 것.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것. 그것이 고통의 끝자락에 단단히 붙어 있는 가장 큰 절망이라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이 고통을 고통으로 지속시켰다. 따라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은 단 하나다. 고통이 끝나는 것. 고통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고통에 대한 언어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고통이 끝난다면 그 모든 걸 접을 수 있다고 했다.
📎 처음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 무엇을 배우려고 한다. 신의 의도든 삶의 의미든 혹은 고통을 다루는 역량이든 뭔가 고통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 되려고 한다. (..) 그러나 대부분의 고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떤 고통은 그 강력한 파괴 때문에 한 번의 고통이 끝없이 지속된다. 또 어떤 고통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반복된다. (..) 고통의 의미를 찾아 뭔가를 배우려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인 과정인 데 반해 고통의 원인은 대개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제거되지 않았기에 반복되거나 혹은 원인이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종종 다시 발생해버리는 것이다.
📎 자기에게 함몰된다는 것은 타인의 말을 듣고 바로 그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법을 잊는다는 말이다.
✍🏻 고통의 곁으로
📎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곁의 역할은 고통을 겪는 이가 자기 고통의 곁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고통을 겪는 이는 대체로 바깥은 붕괴하고 자기에게 함몰되어 있는 상태다. 그렇기에 그에게 곁이 존재한다면, 그 곁은 ‘아직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증하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
📎 사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억울함’이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는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이 어떤 가치가 있다고 여겨야 했다. 이 고통을 통해 자기가 좀더 단단해진다든지, 이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더 나은 행복이 찾아온다든지, 누구나 이런 일을 겪으며 인생에 대해 알게 된다든지, 그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가치가 있다면 고통을 겪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고통은 고통일 뿐 그 안에서 어떤 가치도 발견할 수 없었다.
📎 말을 상실하면 사람은 세상으로부터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나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말’이라는 매체가 사라지면서 사람은 고립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고립된다. 절대적 외로움의 상태에 빠진다. 따라서 절망이란 세계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단절된 상태인 ’외로움‘과 동의어가 된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며 무의미하다.
📎 말로 만들 수 없는 ’공동의 집‘을 다시 짓는 말은 ’소리’다. 어떤 말이든 담을 수 있는 소리를 공유하고 그 소리를 통해 소통하고 교감하는 공동의 집은 말을 뛰어넘는 존재론적 안정감과 실존적 의미를 줄 수 있다. “주님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와 “이 주문에는 다 들어 있어”는 같은 말이다.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말, 그들이 공동의 집을 짓는 말, 그것이 바로 ‘소리’다.
✍🏻 고통의 세 가지 측면 - 사회적, 관계적, 실존적
📎 고통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사회적 측면, 관계의 측면, 그리고 실존적 측면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에서 다시 거주할 세계를 구축하는 언어는 다 다르다.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하고 동시에 주변과 공감하고 더구나 실존적 측면을 응시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마법의 단어‘는 없다.
📎 사람은 언어를 통해 타자와 함께 거할 수 있는 집을 짓는다. 집은 홀로 머무는 공간이 아니다. 홀로 머물 때조차 나와 함께 머문다. 타자 혹은 나와 함께 머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언어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한곳에 있더라도 함께 머무는 게 아니라 제각각 머무르는 고립된 둘이 있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서만 홀로 머물 때조차 함께 머물 수 있으며,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거주하는 집이 있는 존재가 된다.
말하지 못한다는 것,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거주할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이 야기하는 난제가 바로 이것이다.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 사람은 거주할 집을 지을 도구를 잃어버린다. 있던 집은 부서진다. 집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할 수 있는 집이 아님이 드러난다. 그 언어로는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와도 함께 머물 수 없이 홀로 남겨지거나 버려진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고통에 직면하여 언어를 잃어버리는 순간 파괴되는 집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말을 잃어버리거나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 붕괴되어버리는, 다시 지을 수 없는 공동의 집은 세 가지 차원이다. 하나는 사회적 차원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들과 짓는 집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안에서 자기 자신과 거하는 ‘내면’이라는 집이다. 고통의 끔찍함은 이 모든 거주지를 파괴하고 사람을 존재로부터 추방해버린다는 것이다.
✍🏻 고통의 곁에서 - 응답하라
📎 곁을 내어준다는 말이 있다. 곁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친구로서 상대를 돌보고 환대하는 것이 곁이다. 그렇기에 내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곁이 누구보다 먼저 내 이야기를 듣고 헤아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때조차 그 고통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곁‘이라는 친밀성의 세계가 갖는 특징이다.
📎 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이때의 경청은 흔히 이야기하듯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들어주는 게 아니다. “제가 뭘 할 수 있나요. 그저 들어줄 뿐이죠.” 이런 말은 경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경청의 의미를 거스르는 말에 불과하다.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경청 역시 돌려주는것re-이 있는 응답이어야 한다.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은 내가 그에게 돌려줄 게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사이에 집을 짓기 위한 경청은 응답이어야 한다. 응답이 아닌 경청은 경청이 아니다.
📎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말할 것이 남아 있다. 그게 무엇일까?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불가능에 좌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 존재감과 사랑의 힘
📎 사람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존재감’이 필요하다. 내가 존재할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느낄 때 삶은 비로소 살아갈 만한 것이 된다. 존재감에서의 핵심은 내가 쓸모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부정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쓸모 있는 존재라고 생각할 때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게 된다.
📎 사람의 존재감은 크게 세 가지 영역에 걸쳐 있다.
- 사회적 영역 -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나를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때. 사람은 사회‘로부터’ 이익만 추구하는게 아님. 사회적 존재감을 위해서는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있어야 함. ’인정‘이 이 존재감의 핵심.
- 저자가 ’곁‘이라고 부르는 친밀성 영역 - 이 영역이 없이 사회적 존재감만 가지고 있다면, 삶은 부단히 외롭고 쓸쓸해짐. 반대로 사회적 존재감이 없더라도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쓸모 있는 존재로 평가받을 때,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음. 곁의 존재감은 사회적 영역에서 상처받은 존재감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사랑‘이 이 존재감의 핵심.
- 내적 영역 - 흔히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것. 사회나 주변에서 얻지 못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음. 세상으로부터 존재감을 구하는 게 아니라 자기 내면의 세계에서 그것을 구하는 것.
그러나 통상적으로 사회적 존재감과 곁의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내적 존재감을 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자존감과 관련해 흔히 하는 말들을 훑어봐도 알 수 있다. “세상의 가치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 주관을 뚜렷이 가지고”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등등. 이 말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세상과 맞서 싸워 이기라는 것인데 이는 바깥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
📎 사람은 언제 안정적인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성장할 때라고 생각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바뀌는 주변 환경에 적응해가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마지못해 맞춰서 사는 것만이 아니다. 한 번 적응하고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적응 역량과 적응력 자체가 향상된다. 그렇게 향상된 적응력을 바탕으로 적응을 넘어서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 자신이 대체되는 존재라는 것만큼 존재감에 큰 상처를 주는 일은 없다. 존재감이란 잘났건 못났건 간에 자기가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에 대체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스스로를 대체 가능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한 존재감의 고양은 기대할 수 없다. 그저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서 늘 허무함을 느끼며 위축되어 살아갈 뿐이다
📎 사랑과 우정이 있다면 그래도 삶은 버틸 만할 것이다.
📎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상대방의 어떤 속성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이는 흔히 상대방에게 물어보곤 한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 그러면 보통 어떤 면이 좋다고 답을 하다가도 ”그냥 좋아“ ”다 좋아“ ”당신 자체가 좋아“라는 말로 흘러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사랑이 상대방에 대한 어떤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존재 자체로 나아간다.
📎 사랑을 받는 이는 ‘현존’으로 족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는 그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선물과 같은 ‘행위’를 해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가 존중이다. 상대방을 그 자체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를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는 이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나로서의 나, 우리는 이것을 ‘인격’이라 부른다. 사람은 누구나 나 자체로 존중받고 싶어하고, 특히 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대해주길 바란다. 사랑은 내가 다른 어떤 속성이 아니라 바로 인격으로서 존중받는 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손상된 존재감을 고양해준다.
📎 기쁨과 재미의 차이는 그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기쁘게 하는 존재에 대해 고마워한다. 나를 기쁘게 해줬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고마워하고, 그 고마움이 그를 또 기쁘게 한다. 이에 반해 재미는 나를 재밌게 하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는 흔히 나를 재밌게 하는 사람에게 “더 없냐?”며 더 재밌는 것을 요구한다. 기쁨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라면 재미는 관계를 소비한다.
✍🏻 고통을 다루기
📎 글을 읽고 쓰는 것을 통해 사람은 고통받는 타인의 곁뿐만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곁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는 고통의 당사자가 고통의 절대성에 절규하는 당사자의 자리에 머무르며 외로움 때문에 세계를 파괴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했다. 자기 자신의 곁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세계를 구축하게 했다.
📎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에 ‘자기의 복수성’을 구축하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에 의해 외부에서 폭파된 세계를 내면에 구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통의 당사자에게 글쓰기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에 대해 해명하고 자기를 납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과 걸으며 이야기하는 것의 차이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세계’ 때문이다. 앉아서 이야기할 때 만들어지는 세계는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이 사이의 바깥은 무시된다.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의 바깥을 바라보는 일은 매우 드물다. 반면 걸으며 이야기하는 것은 다르다. 걸으며 이야기할 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바깥이라는 세계 ‘안’에 말을 나누는 이들의 ‘사이’가 들어가 있다.
📎 이런 점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교양’이었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 글을 읽고 견문을 넓혔다. 우치다 타츠루는 <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이라는 글에서 견문이 넓어지는 것을 해상도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비유했다. 교양이 쌓이면 어휘가 풍부해진다. 어휘가 풍부해진다는 것은 이전까지 분별하지 못하던 것을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분별해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분별력이 높아지니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높아진다. 더 생생하고 세밀하고 정확하게 사물과 사건을 포착해낼 수 있게 한다.
3. 읽고 나서
고통이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을 건드리는 주제임을 새삼 깨달았다. 이 책은 고통을 겪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곁에서 함께 머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읽는 내내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크게 와닿았고, 그 말할 수 없음이 결국 사람을 더욱 고립시키고 절망으로 이끈다는 생각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고통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노력조차 무의미할 때가 있다는 점도 가슴에 아프게 다가왔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분명 그 경험의 어느 지점에 닿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