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에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에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대산문학상.현대문학상.황순원문학상.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프랑스의 세계적 문학상인 페미나상 외국문학 부분의 파이널리스트에 올랐으며, 르 클레지오가 한국 작가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가로 격찬하기도 한 작가, 이승우가 5년 만에 출간한 장편소설.
사랑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을 시작하고 엇갈리고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어쩌면 더없이 평범해 보이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근원과 속성, 그리고 그 위대한 위력을 성찰한다. 이승우는 '특별한 사람들의 별스러운 사랑 이야기'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험을 할 때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묘하고 당황스러운 현상을 탐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오랫동안 사랑에 관한 순간의 단상들을 떠오르는 대로 메모해온 작가의 기록들에서 탄생했는데, 그동안 이승우가 신과 인간, 구원과 초월, 원죄와 죄의식, 삶과 욕망과 부조리 등 심오하고 무거운 주제에 천착해왔다면, 이번에는 인간에게 가장 내밀하고도 원초적인, 그러나 또 그만큼 낯설고도 모순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했다.
작가 특유의 문학적 현미경과 철학적 통찰력을 통해 집요하게 관찰되는 사랑 이야기는 '사랑'이라는 사건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되어 당혹하고 혼란스러워본 적 있는 독자들에게 사랑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유하도록 도와준다. _ 출판사 책 소개
2. 인상 깊은 구절
✔️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을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 세상에 떠도는 말대로, 사랑하면 용감해지거나 너그러워지거나 치사해진다. 유치해지거나 우울해지거나 의젓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변화인가가 생긴다. 몸 안에 사랑이 살기 시작한 이상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다를 뿐 아니라 사랑하기 전의 자기와도 같지 않다. 같을 수 없다. 사랑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어느 순간 사랑은 문득 당신 속으로 들어오고, 그러면 당신은 도리 없이 사랑을 품은 자가 된다. 사랑과 함께 사랑을 따라 사는 자가 된다. 사랑이 시키고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졌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
✔️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가져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 우리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대단한 일을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일을 견딘다. 그 대단한 일을 하기 위해, 혹은 그 일을 갈망하며 이 대단하지 않은 일을 한다. 이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건 그 일 때문이다. 그 일에 대한 기대가 이 일을 감당하게 한다.
✔️ 경멸은 대처할 수 있고 견딜 수 있다. 경멸은 일종의 공격이므로, 공격에 대해 방위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다. (...) 그렇지만 연민은 공격이 아니고, 비유하자면 부드럽게 껴안는 포옹과 같아서, 일종의 베풂, 심지어 은혜라고까지 할 수 있으므로 방어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민은 피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다. 어떻게, 무엇으로 은혜에 대항한단 말인가. 대항한다 하더라도 은혜에 어떻게, 어떤 손상을 입힌단 말인가. 덧붙이자면 이렇다. 행위자의 행위에 목적이나 계산이 없을 때는 손상을 입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사랑을 하며 살 수도 없는 이 난처한 사람은 사랑을 하지도 못하고 안 하지도 못한다. 사랑을 하려고 하면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사랑을 하지 않을 때의 불안이 덮치기 때문이다.
✔️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도록 강요받는 사람이다. 강요의 주체는 없다. 객체만 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을 포함해서 상대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다. 사랑을 내세워서 무엇을, 그것이 무엇이든, 요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자기 사랑을 얼마나 대단하고 절실한 것으로 표현하든,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권력이 아니고 권력이 될 수 없고 권력이 되어서도 안된다.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을 앞세우는 사람은 지배를 하기 위해 국민들을 사랑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독재자와 다름없다. 독재자의 사랑이 권력욕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에 다름 아닌 것처럼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사람의 사랑 역시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랑을 이용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강요하지 않는데도 강요받는 것이다. 강요하는 이는 없고 강요받는 이만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발화된다. 누구도 사랑한다는 말을 발화할 수는 없다.
✔️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의 삶보다 문제 되는 것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달라고 구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의 삶이다. (...)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한 경험이 아니라 원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경험이 더 근원적이고 더 뿌리 깊다.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한 경험에 의해 생긴 상처는 대상이 되는 재화를 얻음으로써 치료가 되기도 하지만 원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경험에 의해 생긴 상처를 낫게 할 재화는 없다. 그는 단지 구하는 경험을 되풀이할 뿐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상처가 치료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 상처의 고유한 증상이기 때문이다. 구한 것이 구해져도 그의 구하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다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구하는 행위를 되풀이함으로써 자기가 누구인지를 고백한다. 그는 구걸하는 자이다.
✔️ 잘 보이기 위해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는 점에서 우정은 다른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가장 편하고 이상적인 관계이다. 보르헤스는, 사랑과는 달리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정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 말 속에는 증명해야 할 불편한 의무 (우정에는 없는)가 사랑에는 주어져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사랑을 증명할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의무를 당연하게 요구하기도 한다.
✔️ 말은 맥락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매우 불완전하고 비자족적인 신호체계라서 듣고 싶은 데에 따라 달리 들리는 속성이 있다.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대로 들린다. 말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 말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 못지않게 많다고 해서 이상해 할 이유는 없다.
✔️ 일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신의 존재 근거나 존재 방식에는 관심 없다.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 사랑하거나 바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의 근거나 방식이 어떠한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3. 읽고 나서
사랑은 깊다.